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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개월에 한 번씩 어딘가로 떠난다. 국내든 해외든 상관없다. 조건은 하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낯선 곳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떠났다 돌아오면 병원 인트라넷에 로그인할 아이디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머릿속이 완전히 백지가 되어 있어야 다시 일할 힘이 생긴다. 중환자실 일은 체력만 갈아넣는 일이 아니다. 감히 말하자면 정신적 노가다에 가깝다. 환자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 보호자와의 신경전도 일상이고, 다른 과 의료진과의 소통도 매번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환자의 밑도 끝도 없는 불평을 들어줘야 할 때도 있고, 환자는 전혀 협조적이지 않은데 의사의 지시는 그대로 이행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 사이에 낀 샌드백처럼 너덜너덜해진 채로 퇴근하는 날이 많다. 그래서 나는 3개월을 넘기지 않고 반드시 떠난다. 인력이 부족하니 이번만 더 일해 달라는 부탁에도 단칼에 거절한다. 그 거절에 미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미안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크다. 스트레스를 방치했을 때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무너질 수 있는지, 나는 한 친구를 통해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늘 호탕하게 웃던 친구

그녀는 늘 호탕했다.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체력도 좋았다. 장사를 했는데, 언제나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았고, 손님들은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어서 또 그 가게를 찾았다. 장사는 날로 잘됐고 가게는 점점 커졌다. 너무 바빠서 그녀를 만나려면 가게에 가서 일을 도와주면서 얘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그녀가 드디어 결혼을 했다. 늘 혼자였던 그녀가 둘이 됐다는 사실에 나도 마음이 놓였다. 자연히 서로 만나는 일도 뜸해졌다.

2년쯤 지나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여전히 특유의 솔직한 말투로 남편의 외도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다. 몇 달 뒤엔 또 웃으며 암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일 년쯤 지나서, 나는 멀리서 그녀의 부고를 들었다.

그녀는 병원에서의 마지막 두 달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일을 즐겼다고,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차라리 가게에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고 그녀는 말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호탕하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도, 그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녀와 나는 매년 함께 건강검진을 받던 사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2년 사이에 암이 찾아왔을까. 그 스트레스가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일밖에 몰랐던 그녀는 아마 그 무게를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웃는 얼굴이 진짜 마음은 아닐 수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겉으로는 늘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우울감과 정서적 소진이 쌓여가는 상태를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 혹은 '가면성 우울증'이라고 부른다. 감정노동 강도가 높은 직업과 늘 밝은 모습이 기대받는 사람들에게서 특히 잘 나타난다. 겉모습과 속마음의 괴리가 커질수록 자신이 가짜처럼 느껴지고 자존감이 떨어지며, 이게 장기화되면 우울감과 무가치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런 상태가 두통, 소화불량, 불면 같은 신체 증상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에 본인조차 이게 마음의 문제인지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는 점이다.

그녀를 떠올리면 이 개념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손님 앞에서도, 나를 만났을 때도 그녀는 늘 웃었다. 이혼 소식도, 암 진단 소식도 그녀는 웃으며 전했다. 그 웃음이 진짜 괜찮다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버티고 있었던 건지는 이제 물어볼 수 없다.

스트레스는 실제로 몸을 갉아먹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에서는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단기적으로는 위기 상황에 대응하도록 돕는 정상적인 반응이지만, 이 상태가 만성화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장기간 코르티솔 수치가 높게 유지되면 면역체계가 억제되고, 염증 반응 조절 능력이 떨어지며, 혈압과 혈당이 함께 오른다. 실제로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는 사람은 백신 효과가 떨어지고 상처 회복 속도가 느려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근력 감소, 만성 피로, 생리불순, 소화기 문제까지 스트레스가 만들어내는 신체 증상은 생각보다 훨씬 넓다. 스트레스가 특정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몸의 방어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갉아먹어 여러 질환이 자리 잡기 쉬운 상태를 만든다는 점은 여러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이다. 그녀의 2년은, 나에게는 그 설명이 가장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사람마다 스트레스도, 푸는 법도 다르다

누군가는 운동으로, 누군가는 사람을 만나서, 나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정답은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스트레스를 해소할 자기만의 방법이 없는 채로 계속 일에만 파묻혀 있으면 그 무게는 반드시 어딘가에 쌓인다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 방법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몰랐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3개월마다 무조건 떠난다. 이건 사치가 아니라 나에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리고 주위 사람 중에 늘 웃고, 늘 씩씩하고, 늘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더 들여다봐 줬으면 한다. 그 웃음이 정말 괜찮아서 짓는 웃음인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버티고 있는 건지는 가까이서 지켜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참고자료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스마일_마스크_증후군
마음소풍 -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 웃고 있지만 마음은 지쳐 있을 때: https://www.maum-sopoong.or.kr/infor_story/56562
마음소풍 -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 감정노동자의 숨겨진 고통: https://www.maum-sopoong.or.kr/infor_story/18632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iN - 스트레스와 건강: https://www.nhis.or.kr/magazin/mobile/201702/c02.html
서울경제 [스트레스 사이언스] 만성 스트레스의 위해성: https://www.sedaily.com/article/11262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