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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과 생활습관

octopus27 2026. 9. 6. 08:22

 

유전의 힘을 절실히 느끼게 된 순간들에 대해

병원에서 환자의 병력을 확인할 때는 늘 부모님의 병력도 함께 묻는다. 처음엔 그냥 정해진 절차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일을 오래 할수록 이 질문 하나가 얼마나 많은 걸 설명해 주는지를 절실히 느낀다. 부정하고 싶어도, 유전의 힘은 노력의 힘을 이길 때가 생각보다 많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A1C 숫자

내 아버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정기검진을 받을 때마다 남들이 굳이 요청하지 않아도 A1C 혈당 검사를 자진해서 받는다. 그런데 결과는 늘 경계선 근처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 식습관을 조절한다고 하는데도 그렇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먹는 습성 자체가 아버지와 닮았다. 아버지도 마른 체형이셨고, 술을 좋아하셨지만 과식은 하지 않으셨다. 지금의 나도 딱 그렇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버지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 숫자가 나를 늘 불안하게 만든다.

노력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경우들

중환자실에서 일하다 보면 이 불안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자주 확인하게 된다. 얼마 전엔 30대 중반의, 선수처럼 사이클링을 해 온 젊고 건강한 사람이 심장마비로 실려 왔다. 본인도 억울해했고, 솔직히 지켜보는 의료진도 난감했다. 식단 관리도 하고 운동도 꾸준히 했는데 콜레스테롤 수치가 기준치를 훨씬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자들의 병력을 살펴보면 부모님도 비슷한 전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

이런 사례들이 가리키는 게 바로 가족성 고콜레스테롤혈증(Familial Hypercholesterolemia, 이하 FH)이다. 이는 LDL(나쁜 콜레스테롤)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LDL 수용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겨, 부모에게서 자녀로 대물림되는 유전 질환이다. 태어날 때부터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게 유지되기 때문에 나이가 젊어도 심장병 위험이 크게 올라간다. 미국심장협회 자료에 따르면 이런 경우 식단과 운동만으로는 조절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결국 스타틴 같은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 실제로 LDL이 190을 넘고 부모나 형제 중 55세(남성) 또는 65세(여성) 이전에 심장마비를 겪은 사람이 있다면, 이건 노력 부족이 아니라 유전자 문제일 가능성을 봐야 한다는 게 하버드 의대 자료의 설명이다. 대한내과학회지에 실린 2022년 한국인 진료 합의안에서도, 성인은 LDL 콜레스테롤이 190을 넘고 다른 원인이 없을 때 FH 유전자 검사를 고려하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건강보험으로 검사 비용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당뇨도 마찬가지다

당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쌍둥이 연구들을 보면 제2형 당뇨의 유전력은 40~80%에 달한다고 나온다. 부모 중 한쪽만 당뇨가 있어도 자녀의 위험은 두 배에서 여섯 배까지 올라가고, 양쪽 부모가 모두 당뇨라면 그 위험은 더 커진다. 물론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발병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처럼 유전적 배경에 더해 먹는 습관까지 부모와 닮아 있다면, 같은 정도로 관리해도 남들보다 수치가 더 쉽게 흔들리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유전자는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일도 아니다. 흔히 하는 말로 유전은 총알을 장전하고, 생활습관이 방아쇠를 당긴다고 한다. 방아쇠를 아예 당기지 않을 수는 없어도, 얼마나 세게, 얼마나 자주 당기는지는 어느 정도 내가 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가족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들보다 더 일찍, 더 자주 검사를 받고, 경계선 수치라도 가볍게 넘기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게 여러 자료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결론이었다. FH 진단을 조기에 받아 관리하면 관상동맥질환 위험을 약 80%까지 낮출 수 있다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자료도 있다. 당뇨도 마찬가지로, 가족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조기 선별검사가 실제로 발병을 늦추거나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들이 쌓여 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노력이 부족해서 수치가 안 잡히는 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은 같은 노력을 남들보다 더 일찍, 더 꾸준히, 더 오래 들여야 겨우 평균을 따라잡는 출발선에 서 있는 거라고. 그러니 경계선 숫자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이걸 평생 관리해야 할 몸의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개인 경험과 중환자실 관찰을 바탕으로 쓴 주관적인 기록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병원 시스템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의학적 진단이나 치료 결정은 반드시 담당 의료진과 상의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