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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 한 마리로 시작되는 감염 -오래전 기억 하나
초등학교 때 유난히 예뻤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웨스트나일열에 감염돼서 아주 오랫동안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었던 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몰랐고, 그냥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것만 알았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 이 병이 다시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래된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웨스트나일열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기, 그중에서도 주로 빨간 집모기 계열(Culex 속)에 물려서 걸린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는 병은 아니다. 감염된 새를 문 모기가 다시 사람을 물면서 옮기는 구조다. 물린다고 다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어서, 감염되더라도 70~80%는 아무 증상도 없이 지나간다. 나머지에서는 발열, 두통, 근육통, 발진 같은 가벼운 증상이 나타나고, 극히 일부에서만 뇌나 척수로 바이러스가 침범하는 신경계 감염(뇌수막염, 뇌염)으로 진행된다. 그 친구가 겪었던 게 바로 이 경우였을 거다.
한국은 2012년에 해외에서 감염돼 들어온 사례가 한 건 보고된 이후로는 추가 발생이 없다. 다만 이 병을 옮길 수 있는 모기(빨간 집모기, 지하집모기)는 국내에도 서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던 것에 가깝다 — 매개체는 있는데, 아직 이 바이러스가 국내에서 사람 간 전파 사이클을 만들 만큼 자리 잡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해외여행이 늘어날수록 감염된 사람이 입국 후 국내 모기에 물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이론적으로는 그 경로로 국내 확산이 시작될 가능성도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이 나타날까
모기에 물리고 나서 2일에서 2주 사이(보통 2~6일) 잠복기를 거친 뒤 증상이 시작된다. 경증인 경우는 갑자기 열이 나면서 두통, 근육통, 허약감, 식욕 저하, 구역·구토 같은 소화기 증상이 동반된다. 림프절이 붓거나 눈이 아픈 경우도 있고, 환자의 절반 정도는 등이나 가슴, 팔 쪽에 발진이 생기는데 이건 보통 일주일쯤 지나면 사라진다. 문제는 아주 일부, 대략 150명 중 1명꼴로 진행되는 중증 신경계 감염이다. 이 단계로 가면 고열과 함께 목이 뻣뻣해지고, 혼란스러워하거나 방향감각을 잃고, 심하면 혼수상태에 빠진다. 손발이 떨리거나 경련이 오고, 근육에 힘이 빠지며, 시력을 잃거나 감각이 둔해지고, 마비까지 올 수 있다. 그 친구가 겪었던 '오랫동안 의식이 없던' 상태가 바로 이 신경계 감염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을 거다. 회복까지는 수주에서 수개월이 걸릴 수 있고, 드물게 심근염이나 췌장염 같은 합병증이 따라오기도 한다.

누가 특히 위험할까
모기에 물리면 바이러스는 먼저 물린 자리 근처와 림프절에서 증식한 뒤 혈액으로 들어간다. 이 단계(바이러스혈증)에서 열이나 몸살 같은 초기 증상이 나타나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 시점에서 면역체계가 바이러스를 정리하고 끝난다. 문제는 면역 반응이 충분히 빠르지 못한 경우다. 혈액 속 바이러스 양이 오래 높게 유지되면, 그만큼 뇌를 보호하는 혈액뇌장벽을 뚫고 들어갈 기회도 늘어난다. 이렇게 바이러스가 중추신경계까지 침범하면 뇌수막염이나 뇌염 같은 신경계 감염으로 이어지는 거다.
그래서 이 '초기 방어'가 약한 사람들이 위험군이 된다. 65세 이상은 젊은 층보다 신경계 감염으로 진행될 위험이 5~20배 높다고 알려져 있다(65세 이상 약 2%, 젊은 층은 0.5% 미만). 당뇨, 고혈압, 만성 콩팥병, 심장질환, 혈액암, 장기이식 후 면역억제제 복용 중인 사람, 다발성 경화증 환자, 그리고 면역이 저하된 사람 전반이 30~40% 더 높은 위험을 보인다는 연구도 있다. 흥미로운 건 남성이 여성보다 위험도가 높게 나온다는 점인데, 아직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야외 활동이 많아 모기에 물릴 기회 자체가 많은 것도 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다소 의외인 위험 요인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만성적인 음주다. 알코올 관련 질환이 있는 경우 신경계 감염으로 진행될 위험이 뚜렷하게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다. 소아·청소년에서는 신경계 감염 자체가 드물게 나타나고, 그나마 진행되더라도 성인에서 흔한 뇌염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축에 속하는 뇌수막염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고령층에서는 뇌염 형태가 두드러진다. 신경계 감염으로 진행되면 치명률이 약 10%에 달한다는 자료도 있다. 반대로 젊고 건강한 사람은 감염돼도 대부분 가볍게 앓고 지나가거나 아예 모르고 지나간다.
왜 지금 미국 전역으로 이렇게 퍼질까
아래 수치는 2026년 8월 11일 기준이며, 유행 시기 특성상 계속 바뀔 수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자료를 보면, 2026년은 최근 22년 사이 가장 심각한 시즌으로 평가되고 있다. 8월 11일 기준으로 29개 주에서 181건의 인체 감염 사례가 보고됐고, 11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71%는 신경계 침범을 동반한 중증 사례였다. 확산이 빠른 이유로는 기후 변화로 모기 활동 기간 자체가 길어진 것, 그리고 가뭄 뒤에 내리는 비로 웅덩이가 곳곳에 생기면서 모기가 번식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 꼽힌다. 실제로 이번 시즌 가장 심각한 지역인 애리조나주 메리코파 카운티(피닉스 일대)도 이런 기후 패턴과 맞물려 있다.
같은 곳에 있었는데 왜 누구는 안 걸릴까 - 예방법
결국 핵심은 '모기에 안 물리는 것'뿐이다. 해 질 무렵부터 새벽 사이 야외 활동을 줄이고, 기피제를 사용하고, 긴팔·긴바지를 입는 게 기본이다. 집 주변의 웅덩이나 고인 물(화분 받침, 막힌 배수구 등)을 없애는 것도 모기 번식 자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미국 등 유행 지역을 여행했다면, 귀국 후 2주 이내에 발열이나 두통 같은 증상이 생길 경우 반드시 병원에서 여행력을 알려야 한다.
같은 곳에 있었는데 왜 누구는 안 걸릴까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감염돼도 70~80%는 무증상으로 지나간다는 점이다. 즉 '안 걸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 중 상당수는 사실 걸렸는데 모르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 외에는 모기에 물린 횟수(노출량) 차이, 개개인의 면역 반응 차이, 그리고 기피제 사용이나 야외 활동 시간 같은 생활 습관 차이가 실제 발병 여부를 가른다. 나이와 기저질환 여부가 무증상으로 끝나는지, 중증으로 가는지를 가르는 가장 큰 변수라는 점도 이번에 다시 확인했다.
그 친구가 그렇게 오래 의식을 잃고 있었던 이유가, 이제는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 서울아산병원, 「웨스트나일열」 질환백과 — amc.seoul.kr
· MSD 매뉴얼(일반인용),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감염」 — msdmanuals.com
· CDC, 「Current Year Data (2026)」 West Nile Virus — cdc.gov
· Mappr, 「West Nile Virus by U.S. State (2026), Mapped: Worst in 22 Years」 — mappr.co
· 질병관리청, 「해외유입 모기매개감염병 관리」 — kdca.go.kr
· MedLink Neurology, 「West Nile virus neuroinvasive disease」 — medlink.com
·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West Nile virus deaths up by 32% in 2025」 — ama-assn.org

